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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안창호, 도산 안창호, 미스터 선샤인 박정민

by 볕날선생 2018.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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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역으로 배우 박정민씨가 출연했다고 하죠.

안창호, 도산 안창호, 미스터 선샤인 박정민

도산 안창호 선생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각자 맡은 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애국이며, 애족입니다.
-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일제강점기 한국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이자 혁명영도자이시죠.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로 호는 도산(島山).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습니다. 종교는 개신교 장로회입니다.

평안남도 강서군 봉상도에서 농부인 안흥국(安興國)의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안씨 가문의 선산이 있는 대동군 남관면 노남리를 속칭 노내미라 했고, 당시 사람들은 안창호의 집을 '노내미집' 이라고 불렀으며, 도산을 "노내미집 셋째"라고 불렸다고 하죠. 선대는 대대로 평양 동촌(東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때에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으로 옮겨왔습니다.

어려서부터 미소년에 고운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고 하며, 옛날 이야기책을 소리내어 읽기를 좋아해서 동네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는데, 동네 노인들이 저녁이면 사랑방에 모여 "노내미집 셋째"를 불러다가 옛날 이야기책을 읽게 했다고 합니다.

평안남도 대동군 대보면 용인리에서 출생한 봉산 김씨인 김희순(金羲舜)이 세운 한학당에서 수학했다고 하는데요. 후에 도산선생은 김희순 훈장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김희순의 제자 중에서 4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를 직접 세웠다고 합니다.

1895년 미국 북장로회 계통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설립한 구세학당(救世學堂, 경신학교)에 입학해 처음 신학문을 접했고,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민족운동에 눈떴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독립협회가 해산하자 곧바로 낙향하여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고 교육자로 변신했습니다.

3년 후인 1902년 그는 교육활동을 접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데, 리버사이드에서 각종 일을 하면서 공부하는 고학생활을 하면서도 1904년 의친왕, 정재관 등과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였습니다. 공립협회는 안창호가 귀국할 무렵인 1907년에는 지방회 7개를 가진 북미 최대의 한인 자치단체로 발전하는데요. 1907년 그는 불현듯 귀국, "대한사람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하는 애국계몽 운동을 펼쳤습니다. 신민회, 대성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서울과 평양 등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설을 했고, 그의 뛰어난 웅변은 많은 청년들에게 감동을 주어 청년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하죠. 1908년 안창호는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였고, 1909년 김좌진, 이갑 등과 서북학회를 창립했습니다.

하지만 일제 탄압이 심해져서 105인 사건이 일어나 서북지역 항일 인사들이 대거 투옥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 사건 이후로 안창호는 준비론에 입각하여 실력양성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시영, 이동휘, 김좌진과 같은 급진파는 만주로 이동하여 무장항쟁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안창호는 실력양성운동을 원활하게 전개하기 위해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11년 다시 도미, 1919년까지 미국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1913년 5월 13일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운동단체인 흥사단을 설립했습니다. 기본정신은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이었으며 단체의 상징은 기러기였습죠. 이후 흥사단은 3.1운동, 수양동우회 사건 등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 독립운동에 기여했으며, 현재까지 이어져 서울 동숭동을 거점으로 활동중입니다.

이후 박용만, 정순만, 이승만과 함께 미국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했고, 도산은 리버사이드에서 오렌지 따는 일을 계속 하다가 3.1운동으로 임시정부가 설립되려하자 모은 성금을 가지고 상하이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1919년 4월 13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임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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