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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장국영(張國榮, Leslie Cheung)

by 볕날선생 2018.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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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은 '홍콩의 직물왕'이라 불리는 부유한 직물상인 아버지 밑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런데 장국영이 태어나기 전 그의 바로 윗 형인 아홉째가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장국영은 그 아홉째 자식과 같은 날에 태어났고, 이로 인해 가족들은 그를 죽은 아홉째의 환생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말론 브란도, 히치콕도 주문할 정도로 인기 있는 재단사였지만 사업이 바쁘다며 가정을 잘 돌보지 않았고 어머니 외에 둘째 부인도 있었다. 그런 부모의 외면 속에서 누나와 형들에게 치이고 외롭게 자라면서 그를 정성으로 잘 보살펴준 유모를 친부모님보다 더 많이 의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에도 이 유모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성격이 내성적이고 민감한 데에는 이런 성장환경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리즈대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하였으나 아버지의 건강악화로 중퇴하고 홍콩으로 귀국 후 1977년 우연히 참가한 아시아 가요제에서 <American Pie>로 2위에 오르면서 연예계에 데뷔하였다.

오랜 무명끝에 가수로서는 대성공하였지만 영화배우로서 인기를 얻고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 건 1986년 오우삼 감독의 영화 《영웅본색》과 1987년 정소동 감독의 《천녀유혼》에 출연하면서였다. 그 뒤에도 가수와 배우로서 활발히 활동하다가, 인터뷰에서 천안문 6.4 항쟁을 무력 진압한 것에 대해서 중국 정부를 비난한 발언과 삼합회의 영화계 진출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발언을 한 것이 논란이 된다. 홍콩 언론들은 장국영의 콘서트에서 장국영의 팬들 중 한명이 장국영과 오랜 라이벌 관계였던 알란 탐의 팬과 대립하다가 사망했던 사건을 들먹이면서 장국영 같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연예인은 연예계를 은퇴해야 한다는 기사들을 쏟아냈고, 이미 연예계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장국영은 1990년 은퇴를 선언한다. 당시 은퇴 콘서트는 비디오로도 나와 있는데, 무대를 옮겨 다니면서 사방을 둘러싼 팬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하는 장국영을 볼 수 있다.

본래 장국영은 은퇴 콘서트 후 연예계 자체에서 발을 빼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조용히 살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매니저인 진숙분은 장국영이 이미 화려한 연예계 생활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캐나다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 보도 자료를 배포할 때 완전 은퇴가 아닌 가수로서만 은퇴하는 내용으로 배포했고 계속 영화 스케줄을 잡아줬다고 한다. 그녀의 예상대로 장국영은 곧 아무도 자신을 몰라주는 캐나다 생활에 지루함을 느꼈다고 한다.

가수 은퇴 이후, 장국영은 아이돌 태생의 배우라는 한계를 딛고 《아비정전》, 《동사서독》, 《패왕별희》, 《춘광사설》 등 당시 홍콩 영화들 중에서도 굵직굵직한 작품들에 출연하여 훌륭한 연기를 선보임으로써 아시아 전체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1995년에는 가수로도 다시 복귀하여 《A Thousand Dreams Of You》, 《추(追)》, 《유심인(有心人)》, 《좌우수(左右手)》, 《아(我)》 등의 히트곡을 내놓는다.

장국영은 대외적으로는 내성적이고 낯을 가렸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나 스태프들에게는 매우 친절하고 매너가 좋은데다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인격자' 그 자체로 통했다고 한다. 삼합회에 관련된 사람도 많고 각종 괴짜들이 넘쳐나는 홍콩 연예계인데, 그런 사람들조차 기를 못 펴고 착하게 굴도록 만들었던 사람이라고. 다만 둘도 없는 절친이었던 진백강과는 데뷔 이후 서로 사이가 틀어져 한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촬영 당시 한 컷도 서로 같이 찍지 않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진백강이 죽을 때가 되어서야 화해했다. 이 일화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소개된 적이 있다.

1989년에 오리온제과에서 나온 초콜릿'투유' 광고에 출연해서 수많은 소녀 팬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었다. 한국에서 투유 초콜릿 광고를 촬영할 때 촬영장을 방문하는 기자들이나 관계자들에게 손수 초콜릿을 나누어 주며 연습한 한국어로 열심히 인사를 하고 일일이 챙겨주고 배려하는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고. 당시 오리온에서는 초콜릿을 먹고 실제로 본인이 겪은 사랑의 사연을 보내주는 사람들에게 추첨을 통해 장국영의 마지막 콘서트 티켓을 주는 마케팅을 추진했는데 이로 인해 이 초콜릿은 불티나게 팔렸다. 같은 해에 MBC 토토즐에 출연해서 《무심수면(無心睡眠, Sleepless Night)》을 불렀고, KBS 젊음의 행진에 출연하여 이선희와 합동 공연을 했고, 쟈니 윤 쇼에도 출연했다.

사실 유명세를 얻기 이전인 1978년과 1979년에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아시아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국제가요제를 개최하였는데, 한국의 MBC 주관 국제가요제에 2년 연속 출전했던 것.

2003년 4월 1일, 그는 자신이 머물던 홍콩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香港文華東方酒店) 24층 객실에서 몸을 던져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다. 이때가 향년 48세.

공교롭게도, 이 날이 만우절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처음엔 거짓말로 여기고 그의 사망 소식을 믿지 않다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큰 충격에 휩싸였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지 9시간 만에 홍콩에서는 6명의 팬이 투신자살하여 5명이 사망했다. 홍콩 본토뿐만 아니라 전 아시아권의 영화팬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 당시 유행하고 있던 전염병 사스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4월 5일에 그의 추도식에는 전 세계에서 수많은 팬들이 찾아와 그의 명복을 빌었다. 특히 그와 함께 《영웅본색》을 찍었던 주윤발은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와서 장례식에 참석했다.

국내에서도 송광사에서 49재를 치르려고 했으나 SARS 확산 우려의 이유로 무산되었으며, 5월 2일에 일산에서 국내 장국영 팬들이 모인 가운데 천도재(遷度齋)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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