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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제주 4.3 사건

by 볕날선생 2018.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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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대학살극이다. 일본제국의 패망이후 남북한의 이념갈등 발단이 되어 봉기한 남로당 무장대와 미군정과 국군, 경찰간의 충돌 과정과, 이승만 정권 이후 미국 정부의 묵인 하에 벌어진 초토화 작전 및 무장대의 학살로 많은 주민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건이다.

제주도는 이미 일제에게 가혹한 수탈을 당한 걸로도 모자라 결7호 작전이 시행되어 섬이 초토화될 위기에 처했던 적이 있었고, 1945년 이후부터 종전 전까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주도는 미군정의 폭정과 사상 최악의 지속적 흉년에 시달렸다. 그야말로 제주도 역사상 최악의 상황이었다고 봐도 무방했을 때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단독으로 무장대 조직, 경찰서 기습을 가해 제주 4.3 사건이라고 불린다. 물론 실제로는 그 날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고 1947년 3월 1일부터 한국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여기에 이승만 망명 이후로도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거치는 반공정권이 수많은 제주도민을 4.3 사건을 언급하였다는 이유로 체포하고 고문했던 것까지 합치면 실질적인 지속 기간을 더 길게 볼 수도 있다.

목호의 난과 함께 제주도 역대 최대의 참사 중 하나이며, 결7호 작전과 함께 근현대 한국사에서 제주도를 슬픔의 섬, 침묵의 섬으로 바꾼 비극이다. 그리고 여순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경산 코발트탄광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등과 더불어 이승만 정부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또한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미군정 역시 무거운 책임이 있다. 아무리 미국 입장에서 제주도는 냉전 상황에서 군사 요충지 및 임시 거점으로 쓰일, 공산화되면 안 되는 곳으로 보일 수도 있더라도, 미군정은 결코 그 요충지와 그곳에 사는 주민들을 좋게 대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주민들을 탄압하던 기존 관료들을 그대로 쓰고 복시환을 비롯한 밀항선을 통해 자원을 자신들의 주머니으로 빼돌리는 모리(謀利)행위를 하였다. 그리고 이에 분노한 주민들의 항의를 경찰이 총부리를 겨누어 일부 주민을 진짜로 죽이자 사태를 수습하겠다고 좌익 탄압이라는 이념 하에 폭력의 소용돌이를 더 크게 키웠다. 결정적으로 이 폭력의 소용돌이를 수습하려 한 4.28 협정이 정체불명의 세력의 훼방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미군정은 김익렬의 진상 보고를 무시하였고 끝내는 학살에 동조하였다.

그리고 남로당 제주도당 역시 제주 4.3 사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주역들이다. 선동을 통해 대안 없이 일을 크게 벌리면서도 '등산하면 혁명적, 부등산은 비겁 행위'라며 제주도민들에게 입산을 요구했던 김달삼, 강규찬, 안세훈, 고진희 ,문등용, 이정숙 등 남로당 지도부 6인은 도민들이 죽어가는 와중에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구실로 떠나버렸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들과 북한이 연결되면서 제주도민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강해졌고, 남은 무장대 역시 조금이라도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인 주민들을 상대로 약탈과 학살을 일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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